안감내다리/쌀바위/옥녀봉/정릉약수의 유래
옛날 안암동에 안감이라는 채소장수가 살고 있었다.하루는 이 사람이 채소를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밖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떤 점잖은 영감이 술값 때문에 주모와 실랑이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감이 술을 마신 다음 술값을 치르려고 하였으나 돈을 가져오지 않아 야단을 맞고 있었던 것이 안쓰러웠던 안감은 대신 술값을 치러주었다.영감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채소를 팔러 성 안에 들어오거든 자기 집을 찾아 달라며 자기 집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며칠 후 안감이 문안에 들어가 채소를 다 팔고 영감이 사는 집에 찾아갔다.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이었다. 그 영감이 나와서 반가이 맞으면서 주안상까지 차려 대접하고 은공을 갚겠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안감이 사양을 해도 영감이 계속 다그치니까 안감이 안암동은 서쪽으로는 성북동에서 흐르는 개천이 있고, 동쪽으로는 영도사(지금의 개운사)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있는데, 비만 오면 두 개천의 물이 흘러 안암동은 섬같이 되어 사람들이 고생을 하니 이 개천에 다리나 하나 놔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집착하는데 이 채소장수는 동네를 위해 소원을 말하니 영감이 더욱 감동하여 쾌히 승낙하고 동네 앞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리하여 이 다리를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안감내다리, 개천을 안감내로 부르게 되었다.
성북동 숙청문밖에 ‘쌀바위’, 즉 미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는데, 기이하게도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에 걸쳐 꼭 한 되 가량 의 쌀이 나왔다.처음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나무꾼 노인이었는데 그는 매일 여기서 쌀을 가져가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자 나무꾼 노인은 욕심이 생겼다.그래서 쌀을 더 많이 가져갈 양으로 쌀자루를 가지고 쌀바위에 가서 지키고 앉아 나온 쌀을 담고 얼마간 기다렸다가 쌀이 나오면 또 담아 쌀자루에 가득 채웠을 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이렇게 한달을 계속했던 어느날 쌀이 나오던 바위틈에서 쌀은 나오지 않고 대신 끈적끈적한 물이 흘러 나왔다. 깜짝 놀란 노인이 바가지로 바위틈을 계속 긁어보아도 담겨 나오는 건 더 이상 쌀이 아니었다.‘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구나!’ 노인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소문동과 맞닿아 있는 삼선교부터 점차 지대가 높아져 남쪽의 1ㆍ2ㆍ3가에 가서 낙산과 통하게 되는 곳이 과거에 『옥녀봉』이라 부르던 곳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세 명의 신선이 옥녀와 함께 놀았던 곳이라는 전설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성북천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던 때에는 옥녀봉 구릉지대에서 염소들을 풀어 키우기도 했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북쪽 골짜기에 있는 샘물은 옛날부터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하여 『정릉약수』로 불렀으며, 또 샘물이 석벽 뚫린 사이에서 나온다 하여 『환벽천(環璧泉)』이라 불리기도 하였다.6ㆍ25전쟁 후에는 이 샘물 부근도 황폐하였는데, 전란에 남편을 잃고 병중에 있던 한씨(韓氏) 여인이 꿈속에서 신덕왕후의 계시를 받고 심력(心力)을 다하여 약수터를 돌보고 물을 마시면서 몸이 완쾌된 후로 약수는 다시 유명해졌다.최근까지 『정심약수(正心藥水)』로 불리며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물을 마시고 길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 줄을 이었으나 지금은 그 명성만 남은 채 메워지고 터만 남아 있다.